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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tv 서프라이즈,리사 마리 프레슬리 데스 마스크 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리사 마리 프레슬리 데스 마스크,마크 트웨인 외 

-뇌의 미스터리

뇌가 있어야 할 두개골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뇌척수액으로 채워져 마크의 뇌!

마크는 극도로 심한 뇌수종이었다.

 

 

마크의 뇌(300g)는 정상인의 뇌(1500g)의 1/5 용량이었는데 놀랍게도 마크의 지능은 평균치보다 더 좋은 IQ 126었고, 수학과 재학생이었다.

 

뇌CT사진은 존 로버라는 사람이 찍었고, 이에 호기심을 느껴 후에 뇌수종 환자 600명의 뇌CT 사진을 분석하였다.

그결과 뇌의 95%가 비어 있었던 사람이 60명에 달했는데 절반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였다.

평균 IQ는 100이상이었다.

존 로버는 1980년 사이언스지 <당신의 뇌는 꼭 필요한가?(Is your brain really necessary?)>라는 논문을 실었다.

 

신경과학자 존 앤드류 아머

 

이와 같은 이유에 대해서 뇌가 없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신경 세포가 뇌의 역할을 대신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장기의 신경 세포 안에 기억 저장 기능 있어 작은 뇌의 기능을 하며, 장기 이식 수술 후 전혀 다른 사람처럼 성격과 습성이 변한 사례를 그 예로 들었다.

 

1988년 미국 보스턴

48세 여성 클레어는 폐 이식 수술을 받는다.

수술 이후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발레리나였던 클레어는 수술 전 철저한 채식주의자였으나 수술 후 육식을 좋아하고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 등 식성이 바뀌었으며 차분한 성격에서 남성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매일 밤,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팀 엘이라는 남자가 등장을 하였는데, 폐 이식 수술과 연관 있을 것이라 생각한 클레어는 이식할 장기를 제공한 사람을 찾아갔다.

놀랍게도 클레어의 행동이나 식성이 살아 있을 때의 팀 엘의 평소 모습과 일치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은 환자들이 장기 이식이라는 큰 수술을 받은 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착각하는 것일 뿐이며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우연의 일치라면서 반박하였다.

 

뇌의 없는 뇌수종의 경우 손상된 부위의 역할을 다른 부위가 수행하여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뇌가 없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의학계의 큰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한다.

 

-센 강의 이름 없는 소녀

1889년 센 강에서 14~16살의 여자 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소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사인은 익사.

 

소녀가 누구인지 왜 죽게 되었는지 소문만 무성할 뿐 소녀의 정체나 죽음은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결국 소녀의 시체는 시체공시소로 보내지게 된다.

 

그곳의 병리학자는 소녀의 시신에서 놀라운 점을 발견한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평온한 미소로 죽어 있는데 이런 미소는 결코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녀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던 병리학자는 소녀의 얼굴에 데스 마스크(죽은 사람의 얼굴을 밀랍이나 석고로 본 뜬 안면상)를 본 뜬다.

 

그런데 이 데드 마스크를 본 사람들이 이 데드 마스크에 반해 복제를 하고, 급기야 전 유럽에서 품귀현상을 겪는 일까지 생겼다 한다.

 

그리고 데스 마스에 '센 강의 이름 없는 소녀'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예찬하는 글을 당대의 문호들이 썼다 한다.

 

 

1943년 프랑스 파리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는 "소녀의 신비한 미소는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아름답다"라고 했고, 영국의 시인 리차드 르 갈리엔은 데스 마스크와 사랑에 빠진 남자 때문에 그의 아내와 딸이 자살한다는 시를 썼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소설 '말테의 수기'에 소녀의 데스 마스크에 대해 썼는데 "익사한 소녀의 얼굴이란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시체 안치소에서 얼굴을 본 뜬 마스크였다. 너무나 아름다웠고,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그 미소가 너무나 현혹적이기 때문이었다"라고 적었다.

 

당대의 여배우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독일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베어크너는 소녀의 미소를 따라했고, 할리우드 배우 그레타 가르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58년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의료 기구를 제작하던 아스문드 레어달에 의해서 데드 마스크는 예상치 못한 곳에 사용되게 된다.

 

'레스큐 앤(Rescue Anne)'이란 이름이 붙게 되는 심폐소생술 훈련용 마네킹에 데스 마스크의 얼굴을 사용하여 마네킹을 만든 것이다. 

배우는 학생들에게 동기부여가 될거라 생각했고, 1960년부터 레스큐 앤으로 훈련 받은 사람은 약 3억명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사용되는 심폐소생술 훈련용 마네킹으로 남아있다.

 

c.f. 가장 키스를 많이 받은 여인이기도 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1998년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한 여인의 자서전의 이야기다.

 

'나, 리사 마리-엘비스 프레슬리의 진짜 딸 이야기'

 

 

1956년 '하트브레이커 호텔'로 빌보드 차트 석권한 엘비스 프레슬리.

'하운드 독', '러브 미 텐더', '제일하우스 록'와 같은 곡으로 최고의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를 얻는다

그러던 그는 1977년 돌연 사망하게 되는데, 상속자는 전처 프리실라 프레슬리 사이에서 태어난 리사 마리 프레슬리 뿐이었다.

 

 

유언에 따라 25살이 되던 해 대저택 그레이스 랜드와 10억 달러의 유산 상속받았고, 마이클 잭슨,니콜라스 케이지와 결혼과 이혼을 하며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을 받아왔다.

 

 

그런데 엘비스 프레슬리 사후 21년 후인 1998년, 자신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있었다.

스웨덴에 살고 있던 30세의 여성 리사 요한센이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법대를 졸업한 재원이자 평범한 주부였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택에서 자상한 아버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한다.

그런데,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한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그녀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프리실라가 그녀를 스웨덴으로 피신시켜 양부모와 함께 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리사 마리라면서 매스컴에 등장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짜 리사 마리를 등장시켰다고 생각한 리사 요한센은 그 뒤로도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았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사실을 밝히고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자서전 출판 의사를 밝힌 그녀....

 

엘비스 프레슬리 유족 변호인 마티 싱어

"그녀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거짓이다"

 

대중들은 그녀의 주장은 거짓이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름을 빌려 유명세를 타려는 의도라고 판단되어졌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생기게 된다.

스웨덴 법의학의 권위자 하칸 보글런드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어린시절 사진부터 성인이 된 리사 마리 사진 총38장을 비교 분석한 결과 "어린 시절의 리사 마리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리사 마리는 100퍼센트 다른 사람이다"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근거1 이마선의 모양

어린 시절 리사마리는 일자형인데 반해 성인이 된 리사 마리는 브이자형 이마선이라는 주장이다.

이마선은 유전에 의해 형성되므로 일자형 이마선을 가진 프레슬리와 프리실라 사이에서 브이자형 이마선을 가진 리사 마리가 탄생할 수 없다.

 

 

근거2 이마 전체의 넓이와 모양

어린 시절 리사 마리의 이마는 이마가 넓고 앞으로 튀어나온 모양인데 반해 성인이 된 리사 마리 이마의 넓이가 10퍼센트 이상 좁고 납작한 형태이다.

 

근거3 귓볼의 모양

어린 시절 리사 마리의 귓볼은 두툼하고 둥근 귓볼인데 반해, 성인이 된 리사 마리의 귓볼은 얇고 각진 모양의 귓볼이다.

 

 

리사 요한센의 자서전은 출판사의 갑작스런 변심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이에 리사 요한센은 엘비스 프레슬리 유족이 외압을 넣은 결과라 주장하였고, 2011년 엘비스 프레슬리 유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자서전은 정식으로 출간되지 못했지만 암암리에 판매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크 트웨인의 발명

브래지어 착용을 도와주는 후크!

후크의 발명으로 여자는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다.

후크의 발명자는 새뮤얼 클레멘스이다.

 

 

새뮤얼 클레멘스의 필명 '마크 트웨인'이며,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왕자와 거지'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마크 트웨인은 "글을 쓴다는 것은 펜과 종이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면서 발명에 뜻을 두고 있었다.

 

브래지어 후크를 발명하게 된 사연은 1871년 미국 코넷티컷주에 살던 당시 아내의 브래지어 끈을 묶어주다 발명하게 되었다 한다.

당시 여성들의 브래지어는 끈으로 묶게 되어있었다.

혼자서 입기도 힘들었고 입고 벗는데 시간도 오래 걸렸다.

 

브래지어 후크에 대한 특허를 냈으나 브래지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시기는 1900년대이다.

당시에는 브래지어보다 코르셋을 더 많이 사용했다 한다.

 

발명가로써 이름을 올렸으나 돈벌이가 되지 않았던 마크 트웨인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쓴 것이 마크 트웨인 최고의 작품인 '톰 소여의 모험'과 '왕자와 거지'이다.

인세로만 4천 달러(현재 가치 1억원)를 받을 만큼 성공을 거둔다.

 

그런데 1885년 니콜라 테슬라를 만나면서 또다시 발명에 빠져든다.

테슬라는 교류유도전동기,테슬라 변압기 등을 발명하면서 272개의 특허를 낸 천재 발명가였다.

 

마크 트웨인은 글쓰기보다는 발명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결과 풀을 사용하지 않고 신문기사를 끼워넣게 만든 '스크랩북'이나 카드를 이용한 보드 게임인 '메모리 빌더 게임'을 발명하였다.

 

그리고, 페이지 식자기(제임스 페이지가 발명. 수동으로 활자를 조합하던 방식을 자동으로 바꿔주는 것. 실용화되면 생산성을 무려 10배 이상 높일 수 있다.)에 관심을 가져 페이지 식자기의 상용화에 투자를 결심한다.

무려 30만 달러(오늘날의 가치로 8백만 달러)나 투자를 했으나 상용화가 미뤄지던 사이 페이지 식자기와 유사한 제품이 먼저 출시되어 마크 트웨인의 투자는 실패한다.

 

마크 트웨인의 인세 또한 보잘 것 없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 경제공황으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며, 결국 파산을 선언한다.

가족들이 하나 둘씩 죽고 마크 트웨인도 191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언빌비버블 스토리: 영원한 사랑

신부와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 신부의 장례식을 치룬 남자 유량....

사연은 이러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신부 진잉이 뇌전증(간질) 발작으로 사망하였다.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던 것이 소원이라던 진잉...

진잉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결혼식을 감행한 유량....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두사람의 사랑은 중국 전역을 감동시켰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