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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연 패배, 기무라록에 의한 레프리스톱으로 서브미션패

송가연 패배, 기무라록에 의한 레프리스톱으로 서브미션패

송가연과 타카노 사토미의 경기는 타카노 사토미가 기무라록에 의한 레프리스톱으로 서브미션승을 함으로써 기대에 비해 너무도 싱겁게 경기결과가 나지 않았나 싶다.

실력의 차이, 경험의 차이 등이 역력히 드러난 경기였다 할 수 있겠는데, 송가연이 이번 경기의 패배로 인해서 약점을 보완하고 한층 더 성숙하고 발전한 선수가 될런지 아니면 일부 네티즌들의 말처럼 로드 FC 홍보를 위한 거품이 거둬지는 계기가 될런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

 

그럼 송가연을 무력하게 패배하게 한 기무라 락의 기원과 기무라 락 기술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알아보기로 하자.

기무라 락은 영어표현으로는 '암록 기무라'라고 표기가 되는데, 1950년대의 일본 유도계의 전설로 기록되어 있는 기무라 마사히코가 만든 기술이라 한다.

기무라 락이란 이름이 명명된 것은 브라질 주짓수의 그레이시 가문 사람들에 의해서라 하는데, 아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1951년에 있었던 엘리오 그레이시와 기무라 마사히코의 대결에서 당시 2만 명의 관객(브라질 대통령까지 관람하러 옴)들 앞에서 20여 분만에 팔 얽어 비틀기로 엘리오 그레이시의 양팔을 부러뜨렸고 엘리오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세컨측에서 타월을 날려 TKO로 승리를 하였다.

 

엘리오 그레이시

 

이 엘리오 그레이시라는 사람은 현재 이종격투기의 그레이시 주짓수를 창시한 사람으로 패배를 모르고 살았던 사람인데 이 때의 패배로 그에 대한 경의의 의미로 기무라 록이라 명명되었다.

우리나라 태권도 명인처럼 브라질 유술 10단을 지니고 있다.

 

 

어제 송가연 사토미 타카노 경기에서도 송가연의 팔이 이렇게 꺾어졌는데, 만약 레프리 스톱을 하지 않았다면 팔이 꺾여 부러졌을 것이다.

송가연은 버틸 때까지 버텨보고자 했거나 아니면 탭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혼비백산했거나 둘 중 하나일텐데...

사토미 타카노가 독하게 맘을 먹었다면 굉장히 나쁜 결과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기무라 록 거는 방법/가이드[영상 출처: Alan Stockman]
  


어쨌든 기무라 마사히코는 일본 유도의 레전드급인 사람인데, 재밌는 것이 극진공수도를 만든 최영의(최배달)와 강도관에서 함께 유도를 배웠으며 친우(우리나라 표현으로 친구)이기도 했다 한다.

기무라 마사히코와 최배달은 살아 생전 대결을 했는지 기록을 찾아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기무라 마사히코가 남긴 말을 살펴보면 유추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최배달(최영의), 극진가라데 창시자

도장깨기의 달인

(일본의 주요 도장, 미국, 유럽, 남미의 프로레슬러, 복싱선수, 무에타이 챔피언 등 각 나라의 전통무술 고수들과 겨뤄 단 한번의 패배도 없었다)

맨손으로 소를 쓰러뜨리고 쇠뿔을 부러뜨릴 만큼 강했다

 

기무라 마사히코: "최배달 앞에 최배달 없고, 최배달 뒤에 최배달 없다"

 

역도산

 

기무라 마사히코는 당대 프로레슬링계 최고의 스타였던 역도산과 대결하게 된다.

이 사건은 굉장히 유명한 사건으로 쇼와의 간류지마 혈전 이라 부르는 사건인데, 기무라나 역도산 둘다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일대사건이다.

 

그레이시 VS. 기무라 1951년 10월 23일 Maracanã Stadium - Rio de Janeiro, Brasil
영상출처 GracieAcademy 유튜브 공식 채널

 

[쇼와의 간류지마 혈전(昭和の巌流島) 요약]-1954년 12월 24일

원래 '간류지마(嚴流島)의 결투'란 사상 최강의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와 검의 귀신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小次郞)'의 1612년의 결투를 말함인데, 기무라 마사히코와 역도산의 경기가 이렇게 사상 최강의 경기가 될 것이란 기대감이 서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결은 의외의 결과를 낳는다.

요약해보면, 일본인들에게는 유도의 신이었던 기무라 마사히코가 생활고 탓에 프로레슬링 무대에 뛰어든다.

역도산과 잠시 한팀으로 활동했으나 이후 자신의 프로레슬링 단체를 창설하고 독립하여 역도산과의 대결구도로 역도산과 시합을 하게 된다.

원래 정해진 워크(프로레슬링은 정해진 합이 있었다. 이 합이 무너지면 큰 부상을 입을수도...)는 처음 시합을 무승부, 이후로는 둘이 합의하에 그때그때 이기고 지기를 번복하는 것이었는데...

 

시합중에 기무라에게 로블로를 맞은뒤 격분하여 프로레슬링 기술을 그만두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통해 그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고, 기무라는 정신 없이 얻어 맞다가 쓰러지고 만다.

이를 쇼와의 간류지마 혈전 이라 부르는데 이후 기무라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역도산도 이전의 영웅 이미지가 깎여나가는 사건이 되었다.(해당 영상은 유튜브에서'昭和の巌流島'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다)

 

무라타 가쓰시[출처: 야후 재팬]

 

역도산(본명 김신락)은 원래 스모 선수에서 프로레슬러로 전향하여 1953년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서 영웅의 이미지가 쌓이기 시작한 이유는 1954년 2월 미국 샤프 형제를 초청해 태그매치를 벌였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샤프 형제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인을 때려잡은 미국인의 전형'이었고, 반미감정이 있던 일본인들에게 있어 이 태그매치는 '미일전쟁'으로 연출되었다.

역도산은 가라테촙으로 샤프 형제를 때려눕혔고, 역도산은 '반칙을 일삼는 외국 선수에 맞서 최후에 승리하는 일본 영웅 레슬러'로 각인되며 영웅시 되기 시작했다.

'박치기왕' 김일도 그의 제자다.

 

역도산은 야쿠자 단원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역도산이 39세였던 1963년 12월 8일 밤, 도쿄 도심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에서 역도산과 말다툼을 벌이다 갑자기 등산용 칼로 복부를 찔렀다.

흉기에 찔린 다음 날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역도산은 당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 후 생긴 복막염으로 1주일 후에 사망했다.

무라타는 7년 징역형을 받았었고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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