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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뉴스

신비한 tv서프라이즈 670회,의문의 사나이 외

신비한 tv서프라이즈 670회,의문의 사나이 외

-의문의 사나이

1950년 브라질 파이넨셜 호텔 루시우 비텡쿠르는 한 남자의 방문을 받고 문을 열었으나 다음날 가슴부터 등까지 20cm에 달하는 수술자국이 있었다.

수술 실로 꿰매져 있었는데...

경찰에 신고한 후 병원에 실려간 루시우 비텡쿠르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폐종양이 말끔히 제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술을 한 사람은 호세 아리고라는 평범한 광부 출신의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의과 지식이 전혀 없었던 사람으로 7살 때부터 매일밤 꿈을 꿨는데, 그 꿈에는 아돌프 프리츠라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의사가 등장했다 한다.

 

호세 아리고는 맹장염 수술을 시작으로 진료소를 열어 수술을 했다 하는데, 겉모습만 보고도 병명을 알 수 있었고, 마취 없이 수술을 하여도 통증이 거의 없었으며, 소독되지 않는 칼로 수술을 집도하였는데도 감염된 사람은 전혀 없었다 한다.

 

호세 아리고의 심령수술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대사기극이라면서 그를 고소하였고, 1956년 불법의료행위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호세 아리고에 의해 수술을 받고 완치가 된 많은 사람들이 탄원을 했고, 호세 아리고가 의료행위를 하여 돈을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받고 풀려났다 한다.

 

 

그후 1963년 8월 심령현상연구가 안드리야 푸하리치는 호세 아리고에게 실험을 제안하였다.

자신의 몸에 있는 병명을 맞추라는 것이었다.

호세 아리고는 안드리야 푸하리치의 팔끔치에 지방종이 있다는 걸 알고, 의료 장비 없이 수술할 부위를 맞췄다 한다.

그외에도 환자 1000명을 대상으로 병명을 맞히는 실험을 하였는데, 대부분 환자 주치의의 진단과 일치했다 한다.

 

호세 아리고의 이러한 능력을 찾아내기 위해서 뇌파촬영, X선 실험등을 하였으나 결국 알아내지 못하였다.

호세 아리고는 1971년 53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을 하였다.

 

-타이타닉호의 일본인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는 총 711명인데,이 중 유일한 일본인인 호소노 마사부미가 있었다.

그는 일본 내에서 행운의 사나이로 이슈가 되었으나 1년 후 '비겁한 일본인'이라는 불명예스런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 이유는 타이타닉호의 생존자 로렌스 비슬리가 쓴 'The loss of The S.S Titanic'이라는 책 때문이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한 이 책에 "내가 먼저 살겠다며 사람들을 내몰고 구명보트에 탄 한심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문구로 인해서 호소노 마사부미는 평생 비난과 모욕에 시달리며 살다가 1939년 6월 사망한다.

 

 

1997년 영국 더 가디언지의 앤드류 히긴스 기자가 RMS 타이타닉 재단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호소노 마사부미가 정당하게 구명보트에 탔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RMS 타이타닉 재단은 타이타닉 호의 침몰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유품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단체이다.

타이타닉 호의 유품을 정리하던 과정 중에 마사부미의 손자 호소노 하루노미가 그의 일기를 발견한다.

일기장에는 침몰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기가 사실이라는 증거는 당시 10호 구명 보트에 탔던 네샨 크레코리안이 쓴 회고록과의 대조를 통해서였다.

이 회고록과 마사부미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 일치했으며 "일본인과 함께 노를 저었다"라고 쓰여진 대목이 있었다.

호소노 마사부미는 로렌스 비슬리가 타고 있던 13호가 아닌 10호 구명보트에 타고 있었다고 최종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으로 인해서 호소노 마사부미는 사망후 58년이 지난 후 오명을 벗게 되었다.

 





-기막힌 초상화

156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화가이자 황제와 황실가족의 초상화를 전담하는 주세페 아르침볼도에게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명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과 같이 방송이 없던 시대에는 그림이 최고의 홍보 수단 중의 하나였다 하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패하여 땅에 떨어진 위상과 무능력한 황제라 비난 받던 여론을 돌리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은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을 뺏겼고, 해마다 3만 더킷에 달하는 조공까지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초상화로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 주세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서 착안하여 '사계'(The four Seasons)'나 '4원소'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사계

 

'사계'는 황제의 전지전능함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황제의 은총으로 나라가 풍요로워졌음을 암시하는 의미를 담았다 한다.

이로써 막시밀리안 2세는 무능한 황제라는 오명을 벗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황제로 재평가 된다.

 

4원소

 

'4원소'는 황제의 통치로 세상이 질서와 조화를 이뤘음을 비유하는 그림이라 한다.

이들 그림으로 인해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에 이르기까지 궁정화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유럽에서 최초로 백작 작위를 받는다.

 

-마지막 춤

1945년 5월 나치 강제수용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시체더미 속에서 발견된 소녀(당시 17세)는 유대인 말살 정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춤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수감하기 위해 폴란드에 세워진 수용소다.

1940~1945년까지 잔혹한 인종 학살이 이뤄졌다.

 

 

에디트 에바 에거는 부모와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는 샤워실과 작업장으로 보내질 유대인 선별을 하는 나치 친위대 장교인 요제프 멩겔레가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군의관이자 유대인 선별 담당자로 생체 실험을 자행한 '죽음의 천사'라 불리는 공포스런 존재였다.

 

 

에디트 에바 에거는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부모의 원수 앞에서 발레를 췄다.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폐쇄되었고, 오스트리아 군스키르헨 노동수용소로 이감이 되었는데, 4개월 뒤 나치는 물과 식량도 없이 유대인을 그대로 방치한 채 도망을 갔다.

유대인들은 아사를 하였고, 1945년 5월 4일 유대인 시체더미 속에서 에디트 에바 에거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사라진 남자

탕슈앙창은 결혼하려는 여자에게 실연당한 후 조현병(이전에 정신분열증으로 부르던 병명을 새로이 이르는 말)이 나타났다.

감당할 수 없는 치료비와 연이은 불운으로 인해서 탕슈앙창의 어머니는 탕슈앙창을 13년 동안이나 닭장에 가두었다.